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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장수, 톨레다노 디올 CEO 스크랩 0회
작성자 : 리더십(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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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보면 잘 나갈 때는 20%뿐 … 늘 위기에 대비하라
패션에 산업 입힌 수학·공학 박사
부도 위기 회사 거대 기업으로 키워
1995년 론칭 ‘레이디 디올’ 백 히트
다이애나·그레이스 켈리도 선호

수학·공학과 패션·명품. 이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세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최고경영자(CEO) 시드니 톨레다노(64)를 보면 이 둘은 하나의 조화다. 수학·공학박사인 그는 1980년대 부도 위기에 놓였던 디올을 거대 패션 기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패션 브랜드에 산업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94년 입사 당시 6개에 불과했던 디올 매장을 올해 230여 개까지 늘렸다. 디올은 루이비통·펜디·태그호이어·모에샹동·헤네시 등 60여 개의 브랜드를 거느린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 그룹에 속해 있다.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한국을 찾았다. 메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일 서울에서 공식 오픈하는 디올의 플래그십 스토어(브랜드의 대표가 되는 대형 매장) ‘하우스 오브 디올’ 때문이다. 서울 매장은 세계 디올 매장 가운데 최대 규모다. 지난 17일 이곳에서 톨레다노를 만났다.

시드니 톨레다노 CEO는 사업을 하는 데는 장기적인 안목과 전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기적 매출 상승을 기대하기보다는 장기 투자를 통해 충성 고객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했다. [사진 디올]

 - ‘하우스 오브 디올’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사실 3주 전에도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한국에 왔었다. 서울 부티크를 시작으로 디올은 한국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것이다. 세계적 건축가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에게 설계를, 피터 마리노에게 인테리어를 맡겨 하우스 오브 디올을 만들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선 이달 20일부터 8월 25일까지 ‘디올의 정신’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도 개최한다. 한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디올이란 브랜드의 깊이와 글로벌 입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다. 전시회는 모던과 전통이 함께 공존한다. 디올의 면모뿐 아니라 디올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볼 수 있는 자리다.”

 - 전 세계 매장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매장은.

 “가장 최근에 만든 매장이 항상 제일 좋아하는 매장이 된다(웃음). 새로운 기술과 아름다운 제품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별한 매장은 프랑스 몽테뉴가의 본점이다. 그곳은 태어난 집과 같은 곳이라 특별히 애착이 간다.”

 - 오프라인 매장에 왜 집중하나.

 “매장은 프레젠테이션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고객들에게 안락함을 주고 싶다. 그래서 조명도 신경을 쓰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 그 이상이다. 전자상거래가 앞으로 더 발달하겠지만 매장을 방문했을 때 소비자들이 느끼는 경험과는 다르다. 얼굴을 맞대는 관계는 특별하니까.”

 메르스 사태로 디올 측은 전시회를 비롯한 행사 연기를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톨레다노 CEO는 행사 강행을 결정했다. 그는 이날 인터뷰 전 유럽과 아시아에서 온 관계자들과 함께 매장 구석구석을 돌았다. 이들에게 매장의 특징을 일일이 소개했다. 디올 관계자는 “CEO는 진열된 제품의 위치까지 확인할 정도로 꼼꼼하다”며 “이곳도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20일 문을 여는 서울 청담동 ‘하우스 오브 디올’의 내부 모습.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여성복과 남성복은 물론 가방·보석·향수·신발 등 디올이 취급하는 모든 상품을 갖추고 있다. [중앙포토]
 - 디올은 여왕·공주·스타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로 꼽힌다.

 “그들은 디올의 독창성을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디올이 모든 이가 좋아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톨레다노는 95년 ‘레이디 디올’ 백 론칭의 주역이다. 이 백이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국제 개발 담당 상무이사를 거쳐 98년 CEO로 취임한다. 이 가방의 성공에는 영국의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백으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레이디 디올을 들면서 다이애나 비의 우아함을 떠올렸다. 또 패션계에서 알아주는 패셔니스타인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왕비도 디올을 선호한다.

 - 전시회의 주제가 디올의 정신이다. 그게 뭔가.

 “디올의 정신은 우아함이다. 또 스타일리시하고 클래식하다. 내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태도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 아름다움과 우수성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좋은 사람이 돼 함께 나눠야 한다고 늘 얘기한다. 자만해선 안 된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20년 동안 회사를 이끌면서 매일 창업자인 크리스티앙 디오르에 대해 생각하고 그의 자서전도 옆에 두고 있다. 그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제품에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 또 하나는 근면·성실함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톨레다노는 프랑스 명문 에콜 센트랄레 파리 대학에서 수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컨설팅 회사인 닐슨 인터내셔널에서 근무하다 프랑스 브랜드인 키커와 란셀을 거쳤다. 그는 “패션 기업은 예술이 아닌 숫자로 얘기하는 산업”이라는 모토 아래 위기의 디올을 변화시켰다.

 - 어떻게 패션 브랜드와 인연을 맺었나.

 “난 원래 엔지니어였고 액세서리 분야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로부터 매력을 느낀다. 또 새로운 것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다. 20여 년 전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을 만났다. 5분 정도 얘기한 뒤 이 사람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물론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일할지는 몰랐다. 난 모험을 즐기고 오랜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 패션 브랜드에 산업을 입혔다는 평도 있다.

 “디올을 맡았을 때 이미 세계적 명품 브랜드였다. 내가 와서 했던 것은 유통의 집중화였다. 도매부문 사업을 줄였다. 한국의 신세계나 갤러리아 매장 등 입점 매장과 단독 매장이 전체 매출의 93~94%를 차지한다. 단독 매장의 경우 건물을 짓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제대로 교육받은 직원들을 투입한다. 입지 선정도 중요하다. 항공산업에 비유하면 비행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조종사도 확보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디자이너와 같은 장인들에게 많은 투자를 했다.”

디올은 2011년 수석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의 인종차별 발언으로 곤경에 처했다. 당시 갈리아노는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나는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외치며 다른 손님에게 “당신 부모들도 다 가스실로 보내져야 했어”라고 말했다. 파장이 커지자 CEO인 톨레다노가 직접 나섰다. 갈리아노를 즉각 해고한 그는 “갈리아노는 우리가 추구해 온 핵심적 가치에 상반되는 행동을 했다”며 비난했다. 그리고 톨레다노는 며칠 뒤 열린 디올 쇼에 앞서 런웨이에 직접 올라 공식 사과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와 희생자들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개개인의 존엄성에 존경을 표합니다.”

 - 위기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비결은 뭔가.

 “늘 위기에 대응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건·사고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다. 사업이 잘될 때가 변화해야 하는 시기다. 잘 안 될 때는 직원들을 안심시킨다. 그들은 가족 구성원과 같기 때문이다. CEO도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CEO가 중심을 잡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는 때는 20%에 불과하다.”

 - 앞으로 디올의 과제는.

 “시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게 목표다. 고객의 기대치에 부합하고 그 기대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우리의 핵심 시장이다. 그래서 한국에 많은 투자를 한다. 한국은 금도, 석유도 없지만 최고의 인재를 갖고 있다. 미래 핵심 리더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인재 양성에서도 많은 성공을 거뒀다. 이는 디올이라는 브랜드의 프로필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S BOX] 미신에 집착한 패션 거장 디오르 … 타로점 치기 전까지 쇼 안 열어

디올의 창시자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57)는 천재 디자이너로 불렸다. 그는 1957년에 ‘타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그랑빌에서 태어난 디오르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외교관이 되기를 원한 부모의 바람으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건축과 예술에 흥미가 있던 그는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둔다.

 1930년 공황으로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디오르는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를 그리며 패션의 꿈을 키운다. 그러다 41세에 섬유업계 거물 마르셀 부삭의 지원으로 파리 8구 몽테뉴 30번가에 그의 이름을 건 오트쿠튀르 하우스를 연다.

 이듬해 첫 컬렉션을 연 그는 ‘뉴룩’을 선보이며 혜성처럼 패션계에 등장한다. 뉴룩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자극한 패션 혁명으로 기록된다. 그는 “전쟁으로 침체된 분위기에 디자인으로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알파벳 라인 등을 발표하며 세계 패션계를 이끈 디오르는 52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패션계의 거장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한 기간은 단 10년이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패션계의 유행을 주도했으며 혁명적 디자인으로 역사에 남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런 디오르가 미신에 집착했다고 한다. 디오르는 14세 때 손금을 보는 점쟁이한테 점을 봤다. 점쟁이는 그에게 큰 가난을 경험하고 나중에 여성을 상대하는 직업을 통해 성공을 얻는다고 예언한다. 이런 영향 탓이었을까. 훗날 디오르는 단골 타로 카드 점쟁이에게 점을 치기 전까지 절대 쇼를 열지 않았고, 최소 1명의 모델은 반드시 그가 좋아하던 백합 다발을 들고 런웨이에 서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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